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문단 편집) == [[일본 육군]]의 수장(首長) == 1931년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일본 해군]]은 이에 대항하여 1932년 2월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을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해군최고의 군령권자인 군령부장(軍令部長)에 취임시켰다.]] 고토히토가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가 황족이라는 것을 갖고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일이 많았다. 육해군 대립은 물론이고, 파벌싸움이 격렬했던 육군 내부에서는 어느 세력을 막론하고 그를 끌어들여 발언권 확대를 노렸다. 그러나 고토히토 본인은 직속 참모차장으로 독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던 황도파(皇道派)[* 천황 중심으로 뭉치자는 파벌]의 중심인물 마사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郞)에 대한 반감이 커서 통제파[* 군부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파벌]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육군대신이 사임하자 마사키가 후임 육군대신 후보에 올랐다. 이에 고토히토는 뒷날 총리가 되는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를 육군대신으로 밀어, 마사키는 교육총감에 머물렀다. 나아가 마사키를 몰아내고 후임 교육총감에 와타나베 조타로(渡邊錠太郞)를 앉히도록 하야시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와타나베는 1936년에 일어난 [[2.26 사건]]으로 희생된다. 추리소설가 [[마츠모토 세이초]](松本淸張)는 쿠데타 주동세력이 함부로 죽이기 곤란한 [[종친]]을 대신해서 와타나베를 희생시킨 것으로 추측한다. 아울러 2.26 쿠데타의 대응 미숙으로 한때 자신이 가르쳤던 [[쇼와 덴노]]로부터 질책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고토히토의 나이는 70세, 쇼와 덴노는 35세였다. 나이도 두 배지만 항렬은 고토히토가 쇼와 덴노의 현조부(玄祖父)뻘이다. 1940년에는 [[요나이 미쓰마사]] 내각의 육군대신이었던 하타 슌로쿠(畑俊六)에게 사표제출을 지시하여 요나이 내각을 붕괴시켰다. [[왕징웨이]]를 불신하여 이마이 다케오, 이타가키 세이시로를 파견하여 [[동 공작]]을 추진하여 [[장제스]]와의 화친을 시도했으나 9월 하순에 결렬되었다. 그해 10월 3일 참모총장 자리를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에게 물려주고 군무에서 물러나 의정관(議定官)이 되었다. 특히 참모총장 재임 당시에 그는 황족 신분이라 실무에는 관여하지 않고 참모차장이 이를 대행했다. 육군차관 시절의 [[도조 히데키]]는 당시 참모차장 타다 하야오(多田駿)가 본래 파트너가 되어야 할 자신을 제끼고 같은 만주파(滿州派)에 속했던 육군대신 [[이타가키 세이시로]]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매우 불쾌해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